Exhibition Review ; On “ON EVENNESS” _ 조주리 (독립큐레이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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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특색있는 회화 작업들을, 기세있게 쏟아내는 박경률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는 일은 그만큼이나 신이난다. 그가 꼭 박경률이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비슷한 세대의 페인팅 작가들이 품어왔을 고민과 내파, 복구와 재건에 이르는 과정 속의 실험과 성장의 징후들을 투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현재 백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On Evenness>는 최근 몇년간 부단한 실험을 통해 스스로가 견인해 온 도약의 지점에 와 있는 프레젠테이션이다. 미술계에서 반복되어 온, 회화의 회화성을 둘러싼 재귀적 담론이나 세대론의 프레임에 자기작업의 특수성을 녹여내는 일에 큰 흥미가 없어 보이는 작가에게 스스로의 작업논리와 창작리듬은 어떤 것이 선재先在하기 보다는 서로 밀고끌며 회화적 실험의 모멘텀을 만들어 가는 힘이다. 

세 개의 층을 따라 분할된 공간에서 마흔 점 이상의 회화와 조각, 세라믹, 오브제들이 여러 집합과 분산을 이루어 내는 전시의 솔루션은 “회화로부터 확장된 복합설치”의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다. 그러나 회화 개념과 실천의 측면에서 여러 키워드를 관통하는 이번 전시는 퍽 기이한, 경우에 따라서 난해한 풍경이다. 

전시는 작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선보였던 “조각적 회화 설치”의 디스플레이 전략과 특유의 색채사용에서 비롯된 무드를 잇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기에 이전보다 훨씬 정치하게 설계된 우연과 무연의 질서가 있다. 건축의 수직적 입면과 층을 달리하며 조금씩 바뀌는 평면적 조건에 반응하며 걸리고 놓인, 때에 따라 깔리거나 매달려있기도 한 작품들은 카메라 앵글과 관람객의 망막 상에서 높이와 크기, 중첩된 면적과 각도를 매번 달리 제공한다.이러한 전시의 미장센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단독적 대상으로써 감상하는 것을 훼방한다. 그리고 전시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미적 충족감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전시장에 머무르는 시간을 지연시키며, 자꾸만 지나온 자리를 되 살피게 하는 것은 작품의 열린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화면을 구성하는 정형과 비정형, 추상과 구상, 실재와 상상의 파편들 간의 기묘한 어긋남/어울림은 이내 화면 외부로 확장되어 전시장 안팎에서 일종의 프랙탈 구조를 이룬다. 다종의 것들이 특히 더욱 조밀하게 몰려있는 2층 공간에 이르러, 관람객의 아이-트래킹(eye tracking)과 대뇌 피질 활동은 최대치로 분주해진다. 만일 작품의 제목까지도 눈여겨보는 관람객이라면, 어딘가 시니컬한 유머가 깃든 제목 정보까지, 전시는 압축되고 승화된 결정체이기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자꾸만 불러내는 미완태에 가깝다. 

박경률의 최근 회화들은 이미 화면 안에서부터 전경과 후경, 중심과 주변, 손이 알아서 재빨리 그어낸 선과 머리로 구상하고 정성을 다해 채운 면적, 추상과 구상 등 위계와 선후를 정할 수 없는 비 결정적 내러티브 구조를 지향한다. 회화-설치의 원 재료들이 1차 제작된 스튜디오를 떠나 주어진 공간에서의 ‘설치’ 과정을 거치면서 작업의 재료들은 새로운 관람 구조로 재편된다. 그 속에서 끌리는 파편들을 골라내고, 더 큰 덩어리로 이어내어 일종의 집합을 완성하고, 최후의 심상과 서사를 종합해 내는 일은 결국 관람객의 몫이 된다. 

평평하고, 균일한 특질의 회화 전시를 기대하며 온 이들에게는 어쩐지 ‘Even’해 보이지 않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숙고했던 “Evenness”는 어떤 의미였을까. 번역하기에 따라 균질, 균일, 균등의 단어로 이해되기도 하는 “Evenness”는 지난 여름 런던의Lungley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동명의 전시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는다. 작가는 화면 속의 붓질 하나하나, 재현되거나 추상된 이미지, 공간 속의 오브제, 공간을 이루는 자연적/인공적 요소들 마저 모두 작품의 총체적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촉발시키는 개별적이고 “동등한” 회화적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조건들을 동등한 요소들로 받아들일 때, 회화를 작동시키는 관습적 적용과 창작술을 허물어 버리는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 셈이다.

회화를 회화로, 작업을 작업으로, 나아가 전시를 전시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기실 엄청난 우연과 무연이 개입된 복잡한 조건들이며, 그럼에도 그토록 익숙한 예술 생산과 수용의 토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알고 있다. 다만, 자기 작업의 역사와 당위를 다른 각도에서 되묻고, 변화된 실천을 해나가는 박경률의 고민과 궁리로부터 어떤 전망을 해볼법한 단서들을 추려본다. 작가들이 전통적인 이미지메이커로서 붙들려 있는 역할 수행과 전시방법으로부터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 나가는 시도들을 주시하며,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작품과 전시의 룰 메이커가 되고, 이미지 소스를 다루는 공간 속의 DJ 혹은 사이퍼cypher가 되는지, 이윽고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시각적 저자로 이행해 나가게 될지 미루어 그려보게 된다. 


Exhibition Review; 어떤 회화의 동선 <박경률_ON EVENNESS> _ 조은채 (예술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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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명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된 구글의 ‘아트 카메라(Art Camera)’가 떠올랐다. 기가픽셀 카메라와 각종 신기술을 거쳐 재조합된 아트 카메라 속 명화의 초고해상도 이미지. 화면을 확대하면 물감을 덧칠한 흔적까지 선명하게 보이고 실물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픽셀로 이루어진 화면 속의 이미지를 보며 회화의 물성을 감각하는 일은 어쩐지 모순적이다. 박경률의 웹사이트에서도 이번 개인전 <ON EVENNESS>의 1층부터 3층을 구석구석 담은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웹사이트에는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부분마저도 꼼꼼하게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고 시간의 제약 없이 작품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구글의 아트 카메라를 통해 실제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명화를 접할 때처럼, 오히려 웹사이트에서 <ON EVENNESS>를 더 온전하고 자세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물론, 아트 카메라와 박경률의 웹사이트가 불러일으키는 이 감각의 역전을 단순한 착시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ON EVENNESS>에는 방문이 전제되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박경률의 회화에는 현실의 대상을 연상하게 하는 여러 이미지가 층층이 겹쳐 있다. 그러나 이 다양한 이미지의 등장에는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관람객은 이 이미지들이 하나의 표면에 놓일 수 있는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회화를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회화 안의 내러티브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전시의 모든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웹사이트는 최적의 감상 장소가 된다. 하지만 박경률은 ‘내러티브가 부재’한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연출’하면 어떻게 될지 질문을 던지며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고 밝힌다. 회화를 읽고 해석하는, 즉 실물의 회화가 아닌 화면 속의 이미지로도 가능한 이 감상법은 이제 박경률의 작업을 보는 적절한 방식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전시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실물을 마주해야만 할 수 있는 경험이 <ON EVENNESS>를 정확하게 감상하는 방법과 연동되는 게 아닐까?

<ON EVENNESS>에는 회화 외에도 과일, 종이, 꽃, 세라믹 조각과 같은 오브제가 군데군데 놓여있다. 이 수많은 오브제는 박경률의 회화 표면을 연상하게 하는데, 서로 연관성이 희미해 보이는 요소들이 한 장소에 별다른 규칙 없이 출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박경률의 회화 속 이미지를 조형해 놓은 것 같은 이 오브제들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모퉁이에 놓여있기도 하고, 회화의 연장인 것처럼 캔버스와 맞붙어 있거나, 또는 고개를 올려야 보일 만큼 꼭대기에 매달려있기도 한다. 도면은 보통 전시를 보는 경로를 어느 정도 지정해 주지만 <ON EVENNESS>에는 따로 도면이 없다. 이번 전시를 찾은 관람객은 저마다 스스로 동선을 만들어나가겠지만 아마도 1층에서는 벽면을 가득 채운 회화 <Revolving figure>를 감상하다가 이 작업을 받치고 있는 오렌지를 느닷없이 발견하고 웃음이 날지도 모른다. 2층에서는 바닥과 벽, 그리고 회화에 붙어 있는 형형색색의 오브제를 밟거나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3층에서는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따라 회화에 부여되는 새로운 각도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자주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경률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던 “조각적 회화”라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박경률에게 조각적 회화는 완성된 회화 작품 자체, 회화 속의 붓질 하나, 바닥에 놓인 과일,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 등 모든 요소를 동등하고 개별적인 오브제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ON EVENNESS>에서 박경률은 마치 하나의 회화를 구성하는 것처럼 전시 공간 역시 하나의 평면으로 가정하고 각각의 요소를 배치한다. 작가가 관람객에게 회화를 보는 시선의 경로를 제시하지 않듯이, 전체 도면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ON EVENNESS>가 전시인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회화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화 속 각각의 요소에서 그 중요도를 헤아리거나 이면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며 해석할 거리를 찾는 대신에, 오브제로서 균등한 대상들 사이를 거닐고 또 옮겨 다니며 회화를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 이것이 모니터 너머의 사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시라는 환경에서는 가능한 경험이자 박경률의 회화와 <ON EVENNESS>를 정확하게 보는 방법일 것이다.


균질성을 지니는 회화는 가능한가 _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디렉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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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선보인 박경률 작가의 회화는 온전한 평면 회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당혹감을 주었을 것이다. 거대한 캔버스 주변으로 놓여진 것들은 과일, 각목, 액자 프레임 등의 일상의 오브제들이기도 하였고, 물감으로 채색된 비정형의 덩어리들이 놓여있는가 하면, 그림 주변 벽면에 부착된 받침대 위에 놓인 또 다른 덩어리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되 하나로 묶인 단위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 작가의 공간은 하나의 거대한 설치로서 보이기도 하였고,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이미지들은 작은 크기의 캔버스나 종이 위로 그려진 채, 그리고 여기 저기 놓인 덩어리의 형태로서 공간 점유를 시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 공간 속에서 혹자는 그가 회화 작가인지 설치작가인지 잠시 혼란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 작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보아도 점점 미궁으로 빠질 수 있다. 그는 장르적 접근보다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혹은 만들고 있는 이미지가 어떻게 예술로서 조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 털어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연구는 모두 회화적인 것에 귀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는 '조각적 회화'라는 용어를 꾸준히 언급해 왔다. 회화를 조각적으로 혹은 조각을 회화의 영역 안에서 교차시키는 시도는 직접 오브제를 다루지 않았던 2008년 - 2012년까지의 초기 작업 속에서도 드러난다. 이 기간동안 그려진 대형 회화에서는 대체로 캔버스 화면과 벽 혹은 바닥으로 나뉘어진 화면 구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속 캔버스와 전시 공간에 놓여진 실재 캔버스는 구분하여 지칭하는데에도 혼란을 겪는다. 그의 회화 속 이미지 또한 거대한 캔버스와 그 속에 존재하는 그려진 캔버스 위로 펼쳐진 공간으로서, 이미지 속의 회화를 그린 것인지 혹은 캔버스와 마루바닥 사이에서 부유하는 덩어리들을 그린 것인지 다시 한번 혼란스럽다.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재현되어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는 이 이미지들은 회화 속에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 듯 우리의 눈을 두서 없이 쫓도록 만든다. 작가는 캔버스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헤집으면서 끄집어낸 기억의 파편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지극히 직관적으로 이들을 배치하는데, 특정한 경험의 기억 속 오브제를 시작으로 꼬리와 꼬리를 물고  오브제들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부유하며 서로의 관계를 상상하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 사이사이로 다시 채워지는 오브제들, 기억의 이미지들은 연결선이 생략된 거대한 구조물처럼 부유하는 덩어리가 된다. 다시 이 화면을 분할하고 있는 벽면과 바닥으로 눈이 머물때, 캔버스 앞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다. 

회화 전공을 하면서 캔버스를 대하는 동안 박경률 작가는 자신이 다루는 붓의 움직임, 선, 색 등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예술로서 의미를 가지는 이유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고 했다. 직관과 본능적인 그리기에 대한 탐구는 스스로를 제삼자로 놓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무의식적 그리기에 대한 관찰을 시도할 수 있는 실험을 궁리하도록 이끈다. 그리고2013년 겨울,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의 전시를 위하여 치매 노인들과 함께 그리기 프로젝트를 실행하였다. 영상 도큐멘터리와 회화, 설치, 드로잉 등 작가가 다루는 매체는 다양했다. 치매 노인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영상 작업을 진행했다.동시에 그들의 기억을 환기하게 하는 드로잉을 그리게 하면서 작가의 개입이 발현되는 거대한 드로잉 또한 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본능적인 그리기와 논리가 없는 허구의 이미지를 기대하였던 작가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였다. 치매 노인들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명확한 기억이었고, 나름의 논리성이 드로잉에도 반영되었다. 이 프로젝트 이후로 그는 무의식의 행위와 예술 행위가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부터 벗어났다. 공간 속 레이어들을 드러내면서 쌓였던 기억의 파편으로 존재하였던 이미지는 그 중량감과 부피감을 제거하며 점차 표면 자체로 환원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영국 유학시절, 자신의 그림이 어떠한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해결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전 이미지에서 보여준 재현적 묘사로부터 발생하는 이미지의 부피와 무게에 대한 감각, 그리고 네러티브를 유도하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불러들인 이미지에서 그 내용을 삭제하였고 이미지 요소인 선, 색 등만을 남겨두는 변화를 준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감과 네러티브는 삭제되었다. 이들이 제거된 화면 위에는 선과 색 등 재료 자체와 페인터의 몸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회화 요소가 강조되어 있다. 한붓에 슥슥 그려낸 형상들은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특정 캐릭터와 같은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처럼 그려진 선들은 동양의 칼리그래피의 요소를 환기시키며 기호 표기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데에 익숙한 관람객의 의식을 교란시킨다.

그리고 스스로 더 적극적인 이미지의 구조를 만들어서 보는 이들이 각자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재조합 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행위를 작업 방법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것은2017년도에 영국 런던의Madame Lillie Gallery에서 열린<A Meeting Place>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되었다. 이 전시의 설치는 회화, 드로잉이 전시 공간의 벽면에 독립적으로 걸리는 형식이 아닌, 모든 공간적 요소들에 반응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전시장의 바닥, 계단, 벽면, 천장 등 원래 공간의 모든 요소들은 작품의 일부가 되고 작가가 지정하고 행위하는 지점들이 작품 요소로 작동한다. 이러한 성향을 통하여 작가가 언급한'조각적 회화'에서의'조각'에 대한 의미를 전통적 의미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규정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용어를 작가의 작업요소를 공간에 두기 위한 움직임, 작업이 점유하는 지점들에서 작동하는 공간의 시각적인 변화, 관람객의 동선과 시선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전시 공간을 점유하는 모든 것들을'조각'이라는 용어를 발생시키는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현실의 공간과 캔버스 속 이미지의 공간을 균등하게 보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하다. 즉 캔버스 자체를 포함하여 그 표면 위로 발리거나 쌓이는 물감 자체도 공간 점유로 보고 이를'조각적 회화'라고 명명한다.  

이로써 박경률 작가가 공간을 다루는 작업 형식이 초기 작업으로부터 꾸준하고 자연스럽게 연결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아는 조각들이나 일상 오브제들이 공간을 점유하듯 회화 작업을 위한 매개체인 캔버스 역시 공간 속에서 오브제로서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경률 작가가 사용하는 단어 ‘evenness’는 일리가 있다. 그가 초기 작업에서 대상을 다룰때와 다르지 않은 것은, 회화의 평면성을 이야기할때조차 이미지 하나하나를 오브제로본다는 점이다. 캔버스 속에서 점점 그려진 오브제들의 레이어가 쌓이게 되는데 이때에는  화면을 균등하게 다루지 않았고, 현실의 공간과 분리했고, 캔버스 속에서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하였다. 그러다가 근래의 화화에서 작가는 한번의 붓질 혹은 아예 붓이 스치지 않은 캔버스도 용인한다. 평면 속에서 균질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즉 환영으로서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오브제는 덩어리의 형태로 캔버스 밖으로 나가게 되고, 이는 캔버스 자체가 공간을 점유한 것과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다시 한번 다른 각도에서 혼란스러운 제안을 던진다. 그것은 동시대 예술에 대한 화두로서 자신의 회화가 동시대를 반영하는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가 구현하는 방법론이 동시대적인가에 대한 자문을시도하면서자신의 작업이 가질 수 있는 차별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는 학생 시절에 자신이 그리는 선이 왜 예술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내세우지만 결국 불평등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회화의 동등하게 이미지 다루기의 실현을 시도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동시대적 방법론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Baik Art Gallery에서의 2019년 개인전<On Evenness>는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대한 이상향을 표현한 제목으로서의 자신의 고민을 응축한 단어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전시 제목<On Evenness>는 공간 속에서 동일한 요소로 작동하는 이미지, 오브제, 관객, 작가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을 드러낸다.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캔버스를 물질로 대면할 수 있도록 공간 전체를 하나의 물질적 구조물로 구현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전시 공간은 각자의 요소들이 상호 균질함을 유지하는 회화 작업으로 구현될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의 장이 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한 인터뷰에서'감각'을 통하여 보는 회화에 대한 언급도 하였다. 감각만으로 회화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시각적인 훈련만으로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관객들이 회화를'읽기'에 앞서'감각'을 발휘하여 보는 것이 유효하지 않을까에 대한 기대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그려진 대상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 많은 이유와 논리는 잠시 비껴두고, 순수한 취향에 의한 감정의 환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으로서 보여지기를 의도하는 태도이다. 

박경률 작가에게는 관객들이 자신이 그려놓은 선의 스피드를 느끼고,곡선의 우아함을 만끽하고 색의 다양한 감성을 환기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캔버스 바깥으로 튀어나간 장치들을 통하여 관객들에게 불편감과 당혹스럼움을 제공하고자 한다.이는 전형적인 회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색다른 시각을 권유하는 제스처이기도 하다.주변의 이미지들이 캔버스 속 이미지와 교차할 수 있는 배치 관계를 스스로 상정해 볼 수 있는 구조적인 설치를 제시한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나와 동떨어진 영역에서 존재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 또한 현실의 물질들에서 발현 가능한 감각이고 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하는 것이 목표일터이다.물론 관객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이미지와 오브제들을 균질하게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작가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Artist Statement ‘On Evenness’_PARK KYUNG RY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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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evenness>는 그림을 읽는 행위에 주목한 나레이션 실험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무엇이 회화를 만드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전시이다. 전시 제목인 ‘On evenness’는 작가가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작품에 적용하는 방식을 말하는 용어로서, ‘평평한’, ‘균질한’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evenness’는 여기서 화면 위에 올려진 개별의 붓질과 이미지, 그리고 실제 공간에 놓인 오브제(세라믹, 조각, 과일 등), 더 나아가 완성된 회화와 전시 공간의 요소들(벽, 기둥, 조명, 유리창, 소화전 요철 등)도 작품에서 동등하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화의 확장된 재료들을 가지고 작가는 ‘조각적 회화’라는 방식으로 제작한 회화와 회화설치작업을 통해 그림의 내러티브를 결정짓는 구조를 제시한다. 

조각적 회화는 이미지의 위치, 구성, 틀과 같이 회화를 이루는 외부적 요소만으로 내러티브를 발생시키는 회화실험이다. 그것의 핵심은 첫째 이미지를 회화 표면 위에 두는 행위, 둘째 회화 속 형상적 이미지부터 붓질까지 개별의 오브제로 보는데에 있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관객들이 작품에서 무엇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이 본능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작가에게 개별의 이미지의 의미와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질문에서 부터이다. 가령, 그림은 화면 위에 첫 붓질에서부터 연쇄적으로 이미지가 덧붙혀지는 방식으로 완성되지만, 반면에 관객들은 그 과정의 끝에서 부터 내러티브를 읽어 들어오게 된다. 역순으로 정확이 읽어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루트 역시 작가가 지나온 방향이 아닌 관객의 경험이나 이해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읽히게 마련이고 보통은 이를 예술에서의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으로 열어둔다. 그러나 작가는 내러티브가 명확한 작업에서도 조차 이러한  간극이 어쩔수 없이 발생하게 된다면, 만약 내러티브가 부재하거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연출했을 경우 관객은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할지가 궁금해졌다.

이러한 질문을 배경으로 하여 이번 전시는 40여점의 회화와 세라믹, 조각과 함께 배치된 회화설치작업으로 구성된다. 과감하게 내러티브가 삭제된 작품들은 작품명으로 혹은 형상적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먼저 다가가지만 사실 작가의 회화는 특유의 감성을 보여준다거나, 메타포를 가진 대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설치작가가 공간에 오브제를 두는 행위처럼 물성이 지나가는 직관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평면이다. ‘evenness’가 말하는 평평함은 나래이션/구상 회화에서 내러티브를 전달하기 위해 회화적 요소(형상, 구도, 붓질의 개수 등)을 계단 위에 두어 선별적으로 적용한다면, 작가의 작업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평평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과 같다. 그리고 대상을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식하는 작가의 직관적인 그리기 방식은 회화 밖의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함으로써 그가 다루는 회화의 요소들로 확장시킨다. 그래서 회화와 오브제가 공간에 새로이 구성되어 조각적인 형태로 확장 되었을 때에도 작가는 여전히 그것을 회화로 인식하게 된다. 오히려 조각적 회화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가 듯 완성된 그림을 현장에서 다시 한번 오브제로 인식하고 전시 공간의 외부 요소를 활용하여 구성(configuration)함으로써 마치 이야기가 구전되어 지속되는 것처럼 이미 부재한 내러티브를 증식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제목 미정…, 직관의 풍경_ ‘ARTIST INSIDE’ ART IN CULTURE Feb.2019_이현 (아트인컬쳐 기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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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률은 최근 <제18회 송은미술대상>(2018. 12. 21~2. 28 송은아트스페이스)전에 참여해 우수상을 수상하고, 오는 4월 백아트서울갤러리에서 5년 만의 국내 개인전을 선보인다. 직관적으로 그려 낸 다양한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구성하면서 그림의 내러티브를 결정짓는 구조를 탐구한다. 최근 진행하는<On Evenness>시리즈에서는 직접 만든 오브제를 평면작업과 병치하는 ‘조각적 회화’의 방식으로 회화를 보는 사고를 확장한다.


Art 현재 <제18회 송은미술대상>전에 참여해 최근 몇 년간 진행하고 있는 <On Evenness> 시리즈를 공개했다. 크고 작은 평면작품과 함께 세라믹, 나무, 석고 등으로 만든 다양한 오브제를 송은아트스페이스 2층 전시장 곳곳에 놓으면서 ‘회화설치’를 구성했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싶었나?

PKR 작업에 담긴 내러티브보다 그것을 결정짓는 구조를 보여 주고자 했다. 나는 어떤 것에 반응해 그림을 그리고 변화하는 의식에 따라 이미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는데, 보통 관객들은 완성된 작업에서부터 내러티브를 읽어 들어오는 역방향성을 보이지 않는가. 이를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이라고도 부르지만, 내러티브가 분명한 작업조차 그러한 간극이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만약 내러티브가 부재하거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연출했을 경우 관객은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했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조각적 회화’라고 설명한다. 이는 회화를 공간에 설치하는 구조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의 위치, 구성, 틀과 같이 회화를 이루는 외부적 요소만으로 내러티브를 발생시키려는 것을 의미한다.


제스처에서 오브제로


Art 전시장 여기저기에 배치된 오브제가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과 유사한 형태 및 색상을 띤다. 각각의 회화와 오브제는 서로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

PKR 기존에 존재하는 사물을 사용하기보다 세라믹, 흙, 점토 등 자연 재료를 사용해 손으로 직접 오브제를 제작한다. 모습이 닮아 있기는 하지만 회화에

그려진 이미지를 그대로 본뜨지 않고 회화에 등장할 법한, 그러나 그보다는 덜 구상적인 모양으로 구현한다. 특정한 형상을 의도하기보다는 내가 행하는 추상적인 제스처들이 오브제로 튀어나온다고 본다. 회화와 조각이라는 특성 때문에 2D에서 3D로 매체를 확장한다고 오독하기 쉽다. 그러나 ‘조각적 회화’의 본질은, 첫째 개별 이미지를 회화 표면 위에 두는 행위를 말하고, 둘째 캔버스에 올려진 물감 덩어리 또는 붓질 하나하나를 개별의 오브제로 보는 관점이 핵심이다. 즉 회화는 어떠한환영(Illusion)을 부르는 공간이 아니라 물성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미 완성된 회화조차도 전시장에서 다시 한번 하나의 오브제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는 매체의 확장이 아니라 회화를 보는 사고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설치작업이 조각의 형식으로 보일지라도 이 전체가 내게는 하나의 회화이자, 하나의 오브제이며, 하나의 붓질과 같은 상태다.


Art 이번 전시 출품작 <A Meeting Place>는 2017년 런던 마담릴리갤러리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을 재구성했다. 당시 전시 풍경과 비교해 보면 그림과 오브제를 조합하는 구성에 차이가 두드러진다. 작업 특성상 전시장에 설치할때마다 다른 형태의 결과물로 완성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PKR 그림을 그릴 때도 매번 다른 이미지가 나오는 것처럼 공간의 외부적인 조건들이 내게는 회화의 요소처럼 인식되기 때문에 늘 동일하지 않은 상태로 조성하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2017년 런던 사이드룸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이 기점이 됐다. 그곳은 전형적인 화이트큐브가 아니라 오래된 벽돌 건물에 벽을 세워 만든 갤러리인데, 조명 또한 자연광을 사용해 날씨에 따라 전시장 밝기가 달라지는 독특한 환경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상황들이 회화의 일부로 보이면서 공간과 특별한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Art 전시장 구조에 반응하며 회화와 오브제를 배치하는 과정이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상상된다.

PKR 내 그림은 행위 자체가 중요한 특징인데, 그러한 행위가 설치에서도 오롯이 발생하는 것 같다. 회화를 특별히 좋아하기도 하지만 다른 매체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그동안 페이크 다큐멘터리나 소설 등 여러 가지 매체를 다뤄 왔고, 퍼포먼스도 언젠가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이기도 하다. 어떤 레퍼런스에서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페인팅으로 향하는 과정 중, 다른 매체들은 내게 드로잉을 의미한다.


무의식으로 그리기


Art 초기부터 현재까지 작업에서 가장 몰두하는 주제와 핵심 키워드는 무엇인가?

PKR 그리기와 그리는 행위 그 자체다.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그려지는 이미지와 이것을 그리는 행위가 어떻게 예술로 규정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내가 긋는 선 하나가 예술인지 아닌지, 다른 작가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두려울 때도 있다. 회화의 형식을 실험하며 시도해 온 행위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행한 부차적인 과정들이다. 실험을 통해 회화의 본질적인 의미를 질문하고 싶었고, 내가 만든 이미지를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두고자 노력하고 있다.


Art 회화의 형식 실험에 영향을 받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면?

PKR 문학에서 시행된 언어의 형식 실험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세기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가상의 책에 대한 아이디어로 글의 구조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고, 18세기 소설가 로렌스 스턴은 우리가 보통 문학에서 기대하는 서사의 구성을 완전히 뒤바꾸면서 직관적 글쓰기에 주목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고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작업을 명확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대신 내가 그린 수많은 이미지들을 무엇이 예술로 만드는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예술에서 의미는 어느 지점에서 생성되는지 고민하고, 내게 영향을 주는 것과 일상에서 발견한 것을 기록하는 드로잉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드로잉을 ‘연약한 회화’라고 부르면서 회화 작업의 기반으로 삼았다.


Art 2013년에는 치매 할머니들과 협업해 ‘무의식적 그리기’를 탐구하기도 했다.

PKR 초반에는 주변에서 관찰한 대상을 드로잉으로 기록했다면, 점차 회화에 대해 궁금해졌다.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과연 그 그림은 어떤 상태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용산구 치매센터에서 환자 분들을 소개받았다. 처음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엉뚱하고 논리적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꽉 짜인 서사 구조를 갖고 있어서 놀랐다. 이 작업을 통해 무의식으로 그린다는 것이 익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항상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Art 작업을 설명할 때 ‘즉흥’과 ‘직관’을 자주 언급해 왔다. 두 개념의 차이는 무엇이며, 이는 무의식적 그리기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PKR 즉흥은 무의식적 그리기처럼 작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그런데 즉흥은 어떤 상황에서 받은 느낌이나 감정에 관한 것이기에 작가 주체적이다. 그래서 즉흥이 시각화됐을 때 추상의 형태가 나타나기 쉽고, 물성 짙은 회화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내 작업은 즉흥보다 직관에 더 가깝다. 작가의 감정을 드러내는 감성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어떤 대상을 보고 즉각 떠오르는 이미지를 선, 면, 색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성이 얇게 처리되고 물감 대신 이미지의 레이어가 쌓이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자료를 참고하거나 다른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는다. 에스키스를 제작해도 언제나 최종 결과물과 다르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만든 이미지가 훨씬 낫기 때문에 굳이 계획을 하지 않는다.


Art 2008년 데뷔 이후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회화에 몰두하며 다양한 형식 실험을 전개해 왔다. 작가에게 회화가 갖는 매력을 설명해달라.

PKR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가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성과 가장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이 다른 매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투영되기에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가 고민했던 흔적이 매우 미묘한 붓질이나 색감의 차이 만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림을 보는 사람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Art 오는 4월 백아트서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2014년 이후 한국에서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PKR 전시장이 3개의 층으로 나눠져 있어 층별로 총 3개의 작업을 구성할 예정이다. 화이트큐브인 1층은 관람 동선을 고려해 벽에 붙는 회화가 많을 것 같고, 2층은 이번 송은아트스페이스 전시처럼 공간 전체를 사용한 회화 설치를 고려하고 있다. 3층은 전시장에 있는 큰 유리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해가 뜨고 지고, 날씨가 변하는 바깥 풍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비춰지는 설치작업을 구상 중이다.


SongEun Art Award Exhibition ‘Park Kyung Ryul’_SongEun Art Spac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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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Kyung Ryul assembles different image symbols into a collage on one screen and then explores the realm of unconsciousness through the narratives formed by these symbols on the screen. However, as Park experienced the gap between the artist’s intent and the public’s acceptance of the narratives, she came to focus more on the structure that determines the narrative, rather than the narrative itself. The experiment of shedding the conventional form of painting, culminates into the artist’s unique style of “sculptural painting”, which aims to expand the two-dimensional painting into the realm of three dimensions, leading Park to ask a fundamental question on what should be demonstrated by art through this novel experiment.

During this exhibition, Park showcases three sculptural paintings, including the old and the new ones, of the “On Evenness”, which have been in progress for the past few years. These works have successfully expanded the realm of painting into that of installations. Sculptural painting refers to the artist’s way of producing a painting during which unintended narratives are produced as a result of the composition and arrays intuitively created by the external factors such as the position and composition of images and the type of frame, etc. First of all, all the elements in the images of the artist, including specific geometries or intuitive brush strokes, serve as each and every object placed in different parts of the two-dimensional planes. And, as they get together to create one picture(canvas), this in itself becomes another object to be placed in a three-dimensional space with other objects like ceramics, wooden pieces, fruits, cotton cloths, or plasters to form specific arrays. Small and big paintings placed together with various objects will add the last impromptu work on site before final completion. The narrative, which has been expanded from painting installation following two rounds of placements and configurations, is no longer a means to deliver the message or the story created by the objects in the painting but a tool to question the visitors’ conventional “way of reading.” <A Meeting Place>(2017)adopts a holistic approach in illustrating the structure of a painting. The title suggests a place where all acts related with watching a painting take place: that is, a place where the paintings are hung, objects are placed, visitors read the work titles and infer the narratives of a work. <A Pretty Face>(2018)and <Not Titled Yet>(2018)are somewhat subordinated to <A Meeting Place>, whose experiment focuses on narratives that are inherently produced due to external elements unintended by the artist. The title <Not Titled Yet>describes a narrative in an incomplete state, not yet finalized, which is in stark contrast with the apparent title of<A Pretty Face>. As such, the artist uses an abstract and morose title like <Not Titled Yet>and a specific and evident title like <A Pretty Face>to make observations on how an installation of a similar nature can be perceiv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title.

송은미술대상전_송은아트스페이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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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률은 다양한 이미지 기호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 콜라쥬하고, 이들이 화면 안에서 구성하는 내러티브를 통해무의식의 영역을 탐구해왔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 관객이 내러티브를 받아들이는 지점의 괴리를 경험하게 되면서 점차 내러티브 자체보다 그것을 결정짓는 구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전형적인 회화에서 벗어나는 형식 실험은2차원의 회화를3차원으로 확장하는 ‘조각적 회화’라는 작가만의 작업방식으로 선보여지며, 작가는 이를 통해 예술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전시에서 박경률은 최근 몇 년간 진행 중인<On evenness>시리즈의 기존작 및 신작을 통해 회화의 영역을 설치까지 확장한 조각적 회화3점을 선보인다.조각적 회화란 ‘외부적 요인-이미지의 위치와 구성,형태의 틀-이 직관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성과 배치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은 내러티브를 발생시키는 작가의 회화 제작 방식’을 말한다.먼저,작가의 작업에서 특정한 형상들이나 직관적으로 그은 한 번의 붓질 등 모든 그림 속의 요소들은 각각2차원 평면 곳곳에 놓인 하나의 오브제로 기능한다.그리고 이들이 모여 완성하는 하나의 그림(캔버스)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오브제가 되어,세라믹,나무조각,과일,면천,석고 등 다른 오브제들과 함께3차원 공간에 한 번 더 놓이고,특정한 배열을 만들어 낸다.다양한 오브제들과 함께 놓인 크고 작은 회화 작품들 여러 점에 마지막으로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작업을 더하면 작업이 완성된다.이렇게 두 번의 위치하기와 구성하기(configuration)를 통한 회화설치에서 확장된 내러티브는 그림 속 대상이 전달하는 의미나,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관객들의 전형적인 ‘읽는 행위’에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A Meeting Place>(2017)는회화를 보는 구조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작업으로,이처럼 그림이 걸리고,오브제가 놓이고,관람객들이 작품명을 읽으며 작품의 내러티브를 유추하는 곳,즉 그림을 보는 것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예쁜 얼굴>(2018)과 <제목미정>(2018)은 <A Meeting Place>에 종속되는 성격의 작품들로,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외적인 요소들로 인해 자체적으로 생성되는 내러티브에 대한 실험이다. <제목미정>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미완의 내러티브의 상태를 나타내는 제목으로, <예쁜 얼굴>이라는 표면적인 작품명과 대조를 이룬다.작가는 이처럼<제목미정>이라는 모호한 작품명과 비교적 구체적이고 명확한 작품명인<예쁜 얼굴>을 통해 작품명에 따라 관람객이 비슷한 설치작업을 어떻게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지를 관찰하고자 한다.


On Naturalness- NANJI Artists Critic Workshop 2018_CHOI JUNG YOON (Independent curato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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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is era full of artificial man-made things, seeking more natural forms seems to make sense. On many food shows on television today chefs are passionate about finding quality ingredients, and from them bringing out their natural flavor. Chefsprepare the ingredients with their skilled hands, balancing its taste and imparting health and savoriness. A painter, whose process is not unlike that of these chefs, also struggles to find the best materials for painting (like fine fabric, wood, nails, priming materials and paint). A painting is completed through the process of finding natural materials, through attaining a state of relaxation, and then naturally uniting brush, paint, fabric and the body of the artist. Through the memory of meeting PARK Kyungryul in the studio on one hot summer day, I have come to contemplate the meaning of ‘naturalness’ she emphasizes.

 

In painting: creating a new temporality

Reviewing PARK Kyungryul’s work in chronological order, I realize she constantlychanges almost every aspect of her work, like in her compositionof the picture frame, her coloring techniques and the coloritself. Instead of establishing aunique signature style that merely repeats itself, she chooses to give herself to her surrounding environment, its people and places and flows like running water. While her early works are in one complete, closed structure that clearly divides the background and object through precise depictions and coloring, her current works are quite the opposite. For example, the work For you who do not listen to me(2017) interlaces various layers between background and object, making them hardly distinguishable. It seems impossible to find an actual method for ‘reading’ this painting because there is no complete narrative.  In this work rather than one long narrative, fragmented scenes are connected like an omnibus. The reason why the work appears to take on an omnibus structure is that the type of her objects andexpressivetechniques are all quite different. Different categories of images like a severed body or quotation mark on a computer keyboard co-existinside the picture. This applies not only in the objects she paints but also in her modes ofexpression, whichinclude mixed techniques indiverse styles of different times. Some images are executed in realist detail while other parts are expressed in graphic lines.

The concept of time revealed in this work resembles the time we experience through the internet. The world we encounter via monitor easily mixes past, present, and future, surpassing the notion of consecutive time. When searching online for Johann Strauss II’s  ‘Voices of Spring,’Ho Chi Minh Symphony Orchestra, Yiruma, and a cover play by an amateur musician are listed up together on the same screen. Travelling across time and space through the flow of individual consciousness is possible today. Now, instead of one voice of power, hundreds and thousands of diverse opinions coexist and connect through online networks. In this situation PARK Kyungryul also freely accesses and utilizes many resources that have existed throughout the history of art, unfolding new temporalities that corresponds with the present situation in her works.

Outside painting: Formal experiments surpassing the limit of medium

How one work does not capture an entirenarrative leads to new possibilities. As the exhibition space itself becomes an installation, the installation is formed as if composing a single painting. Also, instead of being inside a white cube, the artist’s paintings penetrate into every corner of the space, and are not merely tied to the wall.

The artist’s solo exhibition New Paintings(2017) at Side Room, London, present works that naturally blend into the old brick walls and the natural light. Works on paper fittingly stand in the recesses, and frameless works on fabric are fixed on walls with tape and tack. One painting becomes an installation-painting along with other elements of the space. While Side Room was an experiment in joining a space and a two-dimensional work, the artist tries to directly intervene in the space as a kind of sculptural objectat Madame Lillie Gallery. Here, she exhibits objects she has produced with close-to-nature-materials such as ceramic, fabric, wood and soil. Sculpture, painting and installation are artificial constructs in the name of genre; however, for PARK, distinctions like these no longer seem to be valid.

This interest in the unique formal qualities of each medium is also revealed in her solo exhibition <2013GOHAP404>(2014) at Common Center, Seoul. The artist places an old television on the ground and covers the screen with opaque glass. The video, which was constructed from found footage, becomes a white hazy mass, if one were going through anopaque glass. This can be understood as a gesture that interrupts the function of the television media that most vividly transmits a particular event or situation. While her experimentinthis work weakens the media’s original function by the external intervention, the formal experiments appearing after 2017 are specified as endless expansions over the boundary. Her ‘paintings’ that have continued for more than the last ten years exceeds these artificial boundaries of canvas, expanding towards space and into architecture.

 

Let me go back to this ‘naturalness’ I mentioned at the beginning. The word ‘naturalness’ means ‘there is no strangeness because it has no artificial fabrication’ and ‘it fits the flow and is reasonable.’ The word ‘nature’ means ‘a state existing by itself in the world without added manpower.’ A painting is a form that is created by an artist through intimate physical contact - thus manpower is added. In fact, it can only be made by human hands. What does it then mean that an artwork is natural? PARK Kyungryul’s works have their own form of ‘naturalness’ because she makes consistent decisions such as in her choice of material, painting subject, compositional method, mode of expression, and in her expansion to sculpture and installation. Things that do not seem to harmonize at all gather and stand before us with an appropriate sense of balance.

자연스러움에 관하여 -2018 난지비평워크숍_최정윤 (독립큐레이터), 2018

오늘날과 같이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한 시대에서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서도 요리사들은 좋은 재료를 구해 재료 본연의 맛을 찾는 데 열광한다. 숙련된 손길로 좋은 재료를 다듬어서 균형 잡힌 맛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깊이가 느껴지는 맛에 건강해지는 기운을 받는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화가 역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좋은 천, 나무, 못, 프라이밍 재료, 물감 등 최고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자연과 가까운 재료를 찾아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붓과 물감, 천, 그리고 작가의 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된다. 무더운 여름날 작업실에서 만난 박경률을 떠올리며, 그가 강조해서 말했던 ‘자연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 안에서 : 새로운 시간성의 창안

박경률의 작품을 연도순으로 살펴보다보면 화면 구성방식, 채색 기법, 색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만들어 반복하지 않는 대신,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사람, 장소에 자신을 내맡겨 흐르는 물처럼 유동하기를 선택했다. 초기 작업이 비교적 배경과 대상의 구분이 분명하고, 꼼꼼한 스케치와 채색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완결된 닫힌 구조로 만들어졌다면, 현재의 작업은 정 반대에 가깝다. 그 예로 <For you who do not listen to me>(2017)를 살펴보면, 배경과 대상을 구분하기 어렵도록 다양한 층위의 레이어가 얼기설기 뒤얽혀 있다. 실질적으로 이 그림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애초에 기승전결을 가진 완결된 이야기가 작품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하나의 긴 이야기보다는 단편적인 장면들이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져나간다. 옴니버스식의 구성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가 그리는 대상의 종류나 표현 기법 역시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화면 안에는 절단된 신체와 키보드 자판의 따옴표 표식과 같이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이미지들이 공존한다. 그가 그리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다양한 시대의 기법이 혼종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부분은 사실주의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그래픽 디자인과 같이 선으로만 처리하기도 한다. 

위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개념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경험하는 시간과 닮아 있다. 모니터 위로 접하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손쉽게 넘나들며 순차적인 시간의 개념을 뛰어 넘도록 한다. 유투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왈츠를 듣고자 검색하면, 호치민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루마, 아마추어 연주가의 커버 연주까지 모두 한 화면에 펼쳐진다. 개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수백 수천가지의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고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경률 역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여러 자산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사용하며, 작금의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간성을 작품 속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림 바깥에서 :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형식 실험 

하나의 작품이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는 특성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가능하게 했다.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인스톨레이션이 되면서, 하나의 회화 작품을 구성하는 것처럼 설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화이트큐브가 아닌 일상적 공간에서 그의 회화는 벽에 갇혀있지 않고 공간 구석구석으로 침투했다.  

2017년 런던의 사이드룸(Side Room)에서 열린 개인전 <New Paintings>을 보면, 벽돌로 만들어진 오래된 벽과 자연광에 작품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벽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종이 작업이 알맞게 세워져있고, 프레임이 없는 천 작업은 테이프나 압정 등으로 벽면에 고정시켰다. 하나의 페인팅은 공간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하나의 인스톨레이션-회화가 된다. 사이드룸에서 공간과 평면 작업이 하나로 작동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면, 마담릴리갤러리(Madame Lillie Gallery)에서는 조각적 오브제로 공간 내에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시도를 했다. 세라믹으로 만든 물질-덩어리와 천, 나무, 흙 등 자연과 가까운 재료로 직접 제작한 오브제를 함께 전시했다. 조각, 회화, 설치 등은 장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박경률에게는 더 이상 이와 같은 구분법이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각 매체가 가진 고유한 형식적 특성에 관한 관심은 2014년 커먼센터에서 개최한 개인전 <2013GOHAP404>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오래된 텔레비전을 바닥에 눕힌 뒤, 불투명한 유리를 브라운관 앞에 씌웠다.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되었던 영상 이미지는 간유리를 통과하면서 희뿌연 색 덩어리로 변모했다. 이는 특정 사건이나 상황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하는 텔레비전의 역할을 흩트리는 제스쳐이다. 이때의 실험이 해당 매체의 본래 기능을 외부적 개입으로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2017년 이후에 나타나는 형식 실험은 끝없이 경계의 바깥으로 확장되어가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10여 년 이상 지속해온 ‘그리기’는 캔버스가 만드는 인위적 경계를 넘어 공간으로, 건축의 일부로 뻗어져나간다. 


다시 처음에 말했던 ‘자연스러움’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자연스럽다는 동사는 ‘억지로 꾸미지 않아 이상함이 없다’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는 뜻을 가진다. 자연이라는 명사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회화는 작가가 물리적으로 밀접한 접촉을 통해 만들게 되는 대상이다. 그러니 인간의 힘이 더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인간의 힘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때에는 무엇을 의미할까? 박경률의 작품을 보면, 사용하는 재료, 그리는 대상, 화면 구성 방식, 표현 기법, 그리고 조각과 인스톨레이션으로의 확장까지, 그가 내리는 매 순간의 결정은 상당히 일관된 기준을 따라 이루어져서 그 자체로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을 가진다.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그것들이 적절한 균형감각을 이루며 우리 앞에 있다.


On the Exhibition ‘On Evenness’ _ MARK LUNGLEY (Director of Lungley Galler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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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hibition is comprised of paintings and works on paper. In each work, the artist employs formal dualities from the art historical canon – namely, narration versus abstraction, colour versus line, flat versus passive space, and painting versus drawing. 

The works elude easy categorization, moving freely between apparent abstraction and coded figuration, between traditional painting and illustration. Highly intuitive in approach, rich, colourful paintings flow with a stream of conscious expression, and forms radiate incoherent rhythm. The heterogeneity evident in each composition invites the viewer to resist finding a resolve in finished artworks but indulge in the liminal space that Park creates using her own visual language.

The pleasure in Park’s work is in the complexity of her application, layers overlap and forms appear to collide descending into a curious mix of action and associative reference where bodily experience, memory and perception become embroiled. In A Meeting Place (2018) a limited palette of yellow and oranges is applied as blocky planes of colour and thick line delineations create a daedalean sense of space. Engaged in the semiotics of painterly language itself: thick impasto mixes readily with large brush strokes and shrewd mark making, radiant hues and hurried gestures appear in their own space and time revealing unrelated unconscious.

Gestural brush marks record the creative process through painterly illusion; the composition suggests an organic architecture, evoking an expanse of internalised psychological perception. Park’s composition suggests private thought that is simultaneously whimsical and brutal. Yet, strangely intimate, her abstractions negotiate a space for both ideas and feelings, attune with an emotional appreciation. Park’s hypersensitive style captivates with a convincing resonance, negotiating the sublime traditions of abstract painting with a unique and momentous confidence she paints with a sense of spontaneous immediacy, ultimately, conveying a sense of experimentation and discovery with in her contemplative gestures.

Refuting the typical dichotomy of fast drawings and slow paintings, Park’s works do not exist within a fixed chronology of creation. Some compositions are made in a day, others over the course of months. What is of primary concern is the examination of the hierarchy between media that seemingly exists in art making. By refusing to acknowledge any media-specific pecking order within each picture– Are these drawings? Paintings? Or none of the above? – The artist generates works that interrogates the very production of her practice.


The Told and the Untold - A Meeting Place: Park Kyung Ryul Solo Exhibition _ ROONIE HSU (Independent Curato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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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ment when you walk into the gallery, the show begins. > is Park Kyung Ryul’s second solo exhibition in London, which the artist turns the whole gallery into what we can see as a huge “installation” by creating the interaction between each works and even each part of the space.

Unframed paintings hung high above the human eye level or overlapped with one another; sculptures placed directly on the ground without plinths - the works are not confined to their own sizes as the boundary expands to the whole gallery. Each work can be presented individually, but all together, it allows the artist to convey the idea of her own narrative system.

It starts from words she come across in news. By taking the specific words out of the context, and realising them in her works, the artist deconstructs the text, and breaks the correlation within it, in order to highlight the word itself to further consider the core meaning hiding underneath and how it affects our mundane lives.

‘Spinning’ is the theme that runs through all the objects in this exhibition. The artist picked up the word from the news articles of the tragic Grenfell fire, which left hundreds of people homeless and at least 80 people dead in the deadly blaze earlier this year in West London.

Things in newspapers seem generalised. Whether is a good news or an excruciating one, putting them down in black ink on paper, it describes our everyday life in a rather emotionless way. That is to say, everything in the news become a story of 5W1H - a story of who did what in where at when of why, and by how. It's plain, blunt, or in other word, even on every stories happening around us. Meanwhile, the truth is nothing is even in our world.

Taking the word ‘spinning’ out of its context, it is the sense of word and our recognition to the meaning of it that the artist manages to capture. It would be somehow far-fetched if a viewer immediately identifies this core of the show, as the artist has completely deconstructed the word and put it in an abstract and obscure way with her subconsciousness, which is very much influenced by the style of 18th century novelist Laurence Sterne.

With the idea of creating under the stream of her unconsciousness, it allows the artist to produce something purely in her own perception with the subject in mind. During this process, the word detached from its original meaning, but as it still derives from it, a hint of the word remains.

In Park KyungRyul’s shows, you see movements in the paintings, the figures of spinning object on canvas; you cannot help but move around your eyes to follow the invisible lines that the artist uses to link and hold the objects all together. The exhibition is a web the artist spins, and you are trapped ever since the beginning. 


Alibi for Painting, or Painting for Alibi _ HAHM YOUNG JUNE (Director of COMMON CENT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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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GOHAP404> is based on a court case file which seems to be written in the most neutral and specific language. The artist first dismantles the court case text into groups of adjectives and verbs where nouns are absent until the clearly logical nature and the cause and effect are not important anymore to the three characters who appear in this case. Then, as if empathizing with her own personal experience, she anticipates the images by digging into the emotional bundles floating around each character. She draws a blueprint, elaborately calculates each meaning within, prepares to greet the empty canvas by selecting what to present and not to and when everything is perfectly ready, paints in the posture of a craftsman constructing a building according to the meticulous design he made. As she does not retouch them after they are done, the paintings in this exhibition are the outcome of a process of orderly logical representation which seems almost cold and expressionless.

The most interesting characteristic of this exhibition is that such frigidity described above is not consisted of customary manners used in conventional exhibitions of paintings which is usually a collection of pictures composed of colors, shapes and meanings. This exhibition is a whole set of something representing several pictures, several things that are not pictures, an image that is a picture or that is not a picture. This is because the usual painters reveal in the forefront the by-products of each step during the process of drawing a picture. The process of sensible thinking which one goes through to converge to painting is not a secret recipe known only to the artist anymore. It is not in the field of mystery hidden behind the other side of an accomplished painting.

As a result, the first floor and the second floor of this exhibition are a peculiar rhyming couplet. The first floor is installed as if the object and process of her own painting were a set scene of a theater stage or artifacts of a natural history museum and she secretly hangs a medium-sized painting as fresh as a photograph having just been developed and hung to dry. Therefore, the audience faces the process of the painting which in fact is not supposed to be an artwork before coming into contact with the original work. The audience stands in front of the picture reminding himself of the images and groups of text which were kindly presented by the artist. After reaching the second floor by climbing up the outer stairs after exiting the darkness - which seems like a metaphor of the inner side - the audience may observe several bundles of images hinting on why the relationship of the previously seen picture and those that were not pictures, were defined that way.

Such layout in the showroom could be a representation of the process in which Park KyungRyul searches to find the reason of doing her work. Similar to her previous work where she looked for hints in the non-structured language of patients with dementia, she continuously hypothesizes and experiments to prove a conclusion which may be extremely obvious to her. However, this experiment does not analyze psychologically why certain forms are endlessly being created inside her head. It is not about interpreting why she is inspired by images of a bird or a paper doll. Instead, the artist’s experiments are a question about how to define the relationship of herself with the surroundings (which will be the materials for her painting). It seems that she has learned to be nonchalant or to give up on the cause and effect of the situation itself. Only the act of pursuing the experiments is left and by endlessly doubting herself she will obsessively determine the predestined duty of her work.

 

회화를 위한 알리바이, 혹은 알리바이를 위한 회화 _ 함영준 (커먼센터 디렉터), 2014

『2013고합404』는 가장 중립적이고 명확한 언어로 서술 되었음 직한 어느 사건의 판례를 원안으로 삼고 있다. 우선 사건에 등장하는 세 캐릭터에게 명징한 논리적 실체와 인과 과정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작가는 작가에 의해 명사가 부재하는 형용사와 동사의 묶음으로 판례를 해체한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이입이라도 하듯, 각각의 캐릭터를 둘러싸며 부유하는 감정 덩어리에 직접 파고 들어 이미지를 유추한다. 설계도를 그리고, 그 안의 의미를 정교하게 계산하고,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않을 것을 선택하면서 빈 캔버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모든 준비가 완벽히 끝난 뒤에는 스스로 꼼꼼히 만들어 둔 설계에 맞게 건축물을 시공하는 장인의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 다 그린 뒤에 거의 고치지 않을 정도로 이 전시 속 회화들은 차갑고 무표정하리만치 정연한 논리적 재현 과정의 산물이다.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앞서 설명한 서늘함이 색과 형태와 의미로 구성된 그림의 집합이라는 회화 전시의 일반적 습속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전시는 몇 점의 그림, 몇 점의 그림이 아닌 것, 그리고 그림이기도 하고 그림이 아니기도 한 어떤 이미지의 총체다. 그것은 보통의 회화 작가들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진행할 법한 각 단계의 부산물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에 수렴하기 위해 통과하는 감각적 사고의 과정은 더 이상 작가만이 알고 있는 내밀한 레시피가 아니다. 완성된 회화의 이면에 숨어 미스테리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전시의 1층은 2층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1층에서 우선 본인 회화의 대상과 과정을 연극 무대의 대도구나 자연사 박물관의 유물처럼 설치해 놓고, 마치 갓 인화해서 말려 둔 사진처럼 싱싱한 중형 회화 한 점을 코너 뒤에 슬쩍 숨겨서 걸어 두었다. 그러므로 관객은 이 전시에서 원래의 작품을 만나기 전에 원래는 작품이 아니어야 할 그림의 과정을 대면한다. 작가가 친절하게 늘어놓은 이미지와 텍스트 덩어리를 상기하면서 그림 앞에 선다. 그리고 - 마치 내면의 메타포와도 같은 - 어둠에서 벗어나 외부 계단을 통해 2층에 당도하면, 관객은 앞서 그림과 그림이 아닌 것의 관계가 그렇게 설정된 이유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몇 가지의 이미지 덩어리를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동선은 박경률이 작가로서 작업에 임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치매 환자가 내뱉는 구조화되지 않은 언어에서 힌트를 얻으려고 했던 이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는 지극히 당연할 법한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험은 머리 속에서 끝없이 생겨나는 형상의 원인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 왜 새나 종이 인형 같은 도상이 떠오르는지 해석해보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실험은 스스로를 중심에 두면서 (회화의 재료가 될)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현상 자체의 원인과 결과에는 무관심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체득한 듯 보인다. 단지 실험을 지속한다는 행위 자체 만이 남아, 제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작업에 대한 운명적 당위를 집착적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Exhibition Review ; ‘2013GOHAP404’_ LEE DAN JI (Curator of INSA ART SPACE)_ Monthly Art, Dec. 2014

COMMON CENTER 2014.10.10-11.9

COMMON CENTER 2014.10.10-11.9

커먼센터 2층 본 전시의 마지막 방에서, 유리창이 있던 자리에 걸려 마치 엑스레이 필름처럼 내부와 외부를 뒤집은 듯한 겹드로잉의 인상에 대해 나는 이것이 회화에 대한 작가의 관찰과 기록연구의 구조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불완전함 속에서 작가의 과제를 충실히 옮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고백하고 그녀의 회화에 대한 고민을 잠시 회화 밖의 환경에서 동행하며 반쪽짜리 감상을 해보자 마음먹는다.

전시장 입구에서 검은 커튼(혹은 회화)을 마주한 당신은 그것을 열고 들어가기 전 어떤 ‘입장’을 선택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배우를 볼 것인지, 극을 빌려 구축된 무대의 문제를 관찰할 것인지 말이다. 이번 전시는 법정판례라는 텍스트와 그에 파생하여 펼쳐진 또 다른 영역의 무대, 그리고 추출된 결과로써의 회화, 세 가지의 굴절하는 축을 제시한다. 관객은 동선상 가장 먼저 어떤 글들을 만난다. 매우 중요하고 구체적인 프레파라트로서 이 텍스트는 글이라고 하기에는 제멋대로 부유하는 파편들이지만 주어진 단어 사이의 공백이 비극과 폭력의 서사임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사실’과 ‘증거’, 적용된 법령과 피고인의 가정환경, 사건발생 전후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법정판례 자료이다. 사건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목적의 텍스트, 윤리적인 판단과 오해를 남기지 않아야 하는 객관적인 자료에서 동사와 형용사만 각각 남긴 종이 14장은 작가의 회화연구와 어떤 방향을 같이한다. 어떤 의미에서       ‘존속살해’라는 충격적 서사보다는, 범죄의 경우 공적인 합의를 위해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사건을 “종결”시켜야만 하는 해부적 목적의 텍스트가 생산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주목할 만한 대상의 흡입력을 발견한다. 사건(회화)을 보는 우리는 사건(회화) 밖에 서 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비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가져와 그들의 서사를 확장하고 상상하고 변형하는 결론으로 본 전시를 관람한다면 각 과정의 구성체가 어떤 윤리적인 감정의 표면에서 쉽게 기화되거나 어긋나는 지점에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본 전시에서 작가의 선택은 회화의 신체 밖으로 걸어 나와 다른 대상의 눈으로, 표면 밑의 회화적 사실과 과제를 관찰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1층의 둔탁하게 푸른 벽과 인식하기 어려울 만큼 낮은 사운드( (2014) 사각의 격투기장에서 사고로 선수가 죽은 경기를 모아 만든 영상과 중앙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흐르는 낮은 백색소음의 설치작업)는 극적인 몰입을 유도하는 환경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러나지 않고 적당한 거리의 시각적 청각적 정보를 높낮이 없이 제공함으로써 전시장에 제시된 여러 프레파라트의 편평함을 지지하기도 한다.

박경률은 올해 초 회화가 가지는 “무의식”의 영역, 때로는 애매모호하고 지나치게 남용된  ‘무의식’이라는 본질적 질문을 가지고 질병을 겪고 있는 그의 손님들(치매노인)과 회화의 구조를 실험한 바 있다. 최근 그녀의 몇 가지 실험은 개개의 음으로 곡을 구성하지만 실상 곡의 음계란 무엇이었냐는 치밀한 분석과 분할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의 구현, 특히 회화의 문제에서 결과 이전의 과정을 분절하고 분석함으로써 직관과 객관의 변주를 확인하고 동시에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굴절과 선택을 시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작가의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작가는 사건을 가져왔지만 사건은 회화의 소재만이 아니라 회화를 보는 눈으로써의 목적에 충실했다.


Artist Statement on 2013GOHAP404 _ PARK KYUNG RYUL, 2014

This is a statement I wrote after a few weeks have passed since the opening of the exhibition. This might be a reverse approach of the conventional method, planning(statement)-creation-installation-opening of exhibition-and review, for an entire exhibition to complete.

 

Push the crooked glass door next to a depleted gray sidewalk and a black curtain, not even a meter away, will obstruct your view. You have heard about the unsympathetic image of the showroom so you do not walk away but you are slightly dubious of where the entrance is or if this is all there is to see. You encourage yourself a little and poke the curtain here and there until you find one of the tree openings. Then with one deep breath, you enter the showroom. The deep breath is your first choice of willing to see something as well as a standpoint. It is a similar emotion that is evoked when you pass through a dark alley of an unlit movie theater. Upon entering the space after having unravelled the curtains with some luck, you need to take another deep breath. The opaque darkness made from imperfect lighting as well as the theatrical scene, divides this space with the streets of Yeongdeungpo you were in some minutes ago. After your eyes are used to the space, you finally see the three portraits (in the order they are installed), the set of paper on the table and the movie installation where a faint sound can be heard. The sound can actually be heard when you approach the table where the texts are laid out. By the time you reach deeply into the showroom towards where the sound naturally leads you, this delicate sound becomes a bait to shorten the time of selection by half a breadth. Then you turn your head to meet with a big painting hanging in space.

I confess that this exhibition is using several baits to lure you up to the last room of the second floor to speak about fundamental painting. The title of the show <2013GOHAP404> is the title of a court case from Daejeon District Court named 「2013GOHAP404 PATRICIDE」acting as the main bait to lead the audience throughout this exhibition accompanied by the layout order of the first floor calculated from the entrance of the showroom.

One axis transversing the theatrical setting of the first floor is the narrative. The texts and paintings introducing the characters and more or less suggesting the full account of the circumstances, along with the movie installation which seems to have captured the intense moment of the murder case, reveal how the narrative is extracted from the texts of the inevitably objective court case. To explain in more detail, with the exclusion of adjectives and verbs, every word used to describe the court case file is first deleted. Then, the three main characters (the victim, the defendant and the affiliate) are named and their personalities are created. By accepting the dramatic nature of the violence that you cannot but admit at first hand, in the end with all the materials at hand, you will start writing your own story as if you were one of the three characters. This becomes a narrative painting. From the court case used as materials, a narrative is extracted and transformed and by focusing on this process to select such narrative, it becomes a painting, filling the rest with texts and movie/sound installation. Then the painting moves on to the second floor.

The second floor consists of five rooms. The main adjectives used in the court case are separated and substituted with the fundamental questions about painting. For example, questions such as ‘Can unprocessed intuition be art? If so, what are the methods for intuition to become art? Is self-referenced painting truly unattractive?’, use each adjective as a medium to eventually make the painter ask himself to the painting. Paintings are thus placed in each room along with difficult access, low ceiling and cold fluorescent lighting. Such presentation hinders the attention of the audience who wishes to decipher the images of the paintings completed as overlaid drawings. Upon reaching the last room, four drawings which are overlaid drawings of the eight components of painting, are presented. The drawing installed in the deepest end of the dark room in the form of a light box appears first to make you realize that this exhibition is about scrutinizing painting by distancing itself from it, just as you would see the other side of a sock inside out.

Experiments in asking such fundamental questions is also a question of selecting what to contemplate. This does not come from drawing on an empty space but by pondering over randomly made drawings and the method of production learned from such outcome. As I have already conducted a project on subconscious drawings with demential elderly people in my last exhibition, the question on painting prevails to this exhibition. The rumination of selecting bait and variation trumps the question of what to draw and has entered to the step of which work of intuition to select.

 

선택의 문제, 무엇을 볼 것 인가 _ 박경률, 2014

이 글은 전시가 시작되고 몇 주가 흐른 뒤에 작석한 스테이트먼트다. 전시를 완성하는 보편적인 절차인 기획(스테이트먼트)-창작-설치-전시 오픈-리뷰의 방식을 역으로 접근한 셈이다.

황량한 회색 보도블록 옆 손질 안 된 유리문을 들어서면 불과 1m 앞에 검은 막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전시장의 불친절한 이미지 덕에 발길을 돌리지는 않으나, 사실은 입구가 어디인지, 아니면 이게 다인지 하는 사소한 갈등을 겪는다. 조금 용기를 내어 검은 장막을 푹푹 쑤셔보다 세 가지의 진입로 중 하나를 찾아낸다. 그리고 한 번의 심호흡과 함께 전시장에 입장하게 된다. 심호흡은 무엇을 보겠다는 첫 번째 선택이자 입장(立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깜깜한 영화관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서 느끼는 감정과도 같다. 운 좋게 검은 장막 너머 공간으로 진입하고 나면 다시금 한 번의 심호흡이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은 조명이 만들어낸 불투명한 어둠과 연극적 장면이 일단 불과 몇 분전 있었던 영등포 거리와 이곳을 가른다. 잠시 눈을 공간에 익숙하게 만들고 나면 비로소 (순서 상) 초상화 세트와 테이블 위에 종이들, 그리고 희미한 사운드가 들리는 영상설치작업이 보인다. 사실 텍스트가 놓여 있는 테이블 근처에 왔을 때나 사운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전시장 깊숙이 들어오게 될 때쯤, 이 미세한 사운드는 반 호흡 정도 선택의 시간을 단축하는 미끼가 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공중에 매달린 커다란 회화를 만난다.

고백하자면 이 전시는 여러 개의 미끼를 이용해 2층 마지막 방까지 유인하여 결국은 원론적인 회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시 타이틀 <2013고합 404>는 대전지방법원의 판례인 사건 <2013고합404존속살해>의 분류상의 제목이자 전시장 진입부터 계산된 1층 공간의 동선과 함께 이번 전시를 정주행하도록 유도하는 주요 미끼로 작용한다.

1층 공간의 연극적 상황들을 가로지는 하나의 축은 내러티브다. 캐릭터를 상정하고 적잖이 사건의 전말을 암시하는 텍스트와 회화, 그리고 살인사건의 격정적 순간을 포착한 듯한 영상철치작업들은 객관성을 담보하는  판례라는 텍스트에서 내러티브를 추출하는 방식을 차례로 보여준다.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우선 판례 전문에서 각각 형용사와 동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삭제한다. 그리고 주요인물 세명(피해자, 피의자, 관련인)에 대해 이름 짓기와 캐릭터를 만든다. 일차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드라마적인 폭력성을 인정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그러한 재료를 바탕으로 주요인물 중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그리고 공간은 서사적 회화가 된다. 법정판례라는 재료에서 내러티브가 추출되고 변이되는 과정에 집중하여 선택한 서사,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한 점의 회화, 그 이외에 다른 영역은 텍스트와 영상/사운드 설치로 채워진다. 그리고 다시 회화에 대한 부분은 2층 공간으로 넘어간다.

2층의 공간은 5개의 방으로 구성된다. 판례에서 쓰인 대표적 형용사를 원본의 내러티브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입시킨다. 가령, ‘가공되지 않은 직관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그런다면 직관이 예술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각각의 수식어를 매개로 하면서, 결국 회화가 회화에게 스스로 묻게끔 한다. 그렇게 회화는 동선의 번거로움과 낮은 천장, 그리고 차가운 형광등과 함께 각 방마다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연출은 이미지의 겹그림으로 완성된 회화 속 이미지를 해독해 보려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지막 방에 다다르면 회화의 구성 요소를 분리한 각각8장의 드로잉을 겹친 4점의 그림을 보게 된다. 어두운 방에서 마치 라이트 박스처럼 연출된 가장 안쪽 깊숙이 설치 된 드로잉부터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마치 바로 신은 양말을 뒤집어 그 이면을 본 것처럼 이 전시가 회화와 거리를 두고 그 면면을 따져보려는 것임을 눈치채게 된다.

이렇게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실험은 곧 무엇을 선택해서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는 빈 화면에 그려 넣게 될 ‘어떤 것’이 아니라, 우선 무작위로 그려놓고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로 체득된 제작 방식에서 온다. 이미 이전 전시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에 대해 치매 노인과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듯이, 회화에 대한 질문은 본 전시에서도 이어진다. 미끼와 변주의 선택이라는 고민은 무엇을 그리느냐는 문제를 넘어 직관 된 모든 것 중 어떤 것을 선택 하느냐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On the Exhibition ‘Vulnerable Drawing’ _ KIM IN SUN (Director of Willing N Dealing), 2013

The paintings I had seen of the artist Park Kyung Ryul were tanglements of images that seemed as if everything inside the head had been thrown up on top of massive canvases. One day, the artist talked about a drawing project based on conversations with demented elders, and I was curious about what relation it would come to have with the artist’s work up until that moment.  This next project, which will be held in Willing N Dealing, could probably well become the next step in creating a new style for the artist and might even allow us to unexpectedly reach an intimate relation to her existing works.

 

This is how the project goes: its subjects are the artist’s paternal grandmother and the elders that are under the care of the Dementia Community Center of Yongsan-gu. Together, they talk about the old days and make drawings. The artist regularly meets with three elders and pulls stories out of their old memories. In conversations with demented elders, out of the blue, famous people or off-the-wall nouns referring to themselves appear, like“I am yellow”.  While listening to their stories and identifying, one by one, the associated images inside their heads, each of the elders’drawings were revealed. Their stories usually dwell in the past as incoherent, and although their current situations are blank slates, they talk about memories that are more than 60 years old, as clearly as if they had happened yesterday. Most of their stories are reproduced with the artist’s hand, and the coloring work is done by the elders. The elders were interviewed to tell stories of the old days, tracing back their own memories.  The stories were put into a fake documentary film, with the woven stories fabricated into a single story of an elderly actress.

 

After finishing the project at the dementia center, I visited the artist’s studio. The artist took out massive drawings, little drawings, drawings of the elders, films – all of which will be installed and shown in the exhibition. The artist talked about the personal change that she underwent while doing this project. The artist’s original working style was to collage her experiences and memory into a composition on the canvas, stirring the field of ‘unconsciousness.’ In this project, the artist wanted to embark on a persistent investigation of ‘drawing unconsciously.’ According to the artist’s words, the moment something is expressed, it is bound to be in the state of consciousness, even‘it had been drawn unconsciously’. Therefore, the hypothesis which the artist comes to is this: “unconsciousness is consciousness that is in the unperceivable range. In other words, within the range of consciousness, there is unconsciousness and perception, and what is transformed from the range of unconsciousness into the range of perception may be the so-called unconscious drawing in art.” Because the artist had always worked alone, this was her first time working in a way in which she meets someone and together, listen to stories. The artist herself had been skeptical of working with this approach, but it seems that during her regular meeting with these elders, the artist experienced an assimilation of emotion: crying and laughing at their stories. At the end of the project, there was a situation where one of the demented elderly women could no longer come to the dementia center because her husband who had late-stage lung cancer, and who always brought her to the center eventually passed away.  This demented old woman could not feel any pain and the artist was sad. This woman’s drawing, therefore, looks lonesome, vulnerable, and innocent.

 

In the drawings, we are able to see their lucid memories inside their unconsciousness along with the fabricated stories, coming together at some point and becoming tangled-up. The artist, drawn into their field of unconsciousness, could not completely shake off what seemed to have been shared emotions of their brilliant and ruthful pasts. Thus, an unexpected empathy occurred, and due to it, their stories are once again reproduced as a story that the artist tells, seasoned with emotional lines in each of the massive drawings. The artist’s previous paintings are characterized by their solid images, dense compositions, intense colors, and the sense that it was completely assembled. It was like an assembly of multiple, and distinctly completed images, pulled out her own memory, washed and polished to be revealed in the world. The drawings that were made for this exhibition, on the other hand, excluded the process of fabrication as much as possible. It seems as though she is trying to maintain the rawness of the emotions and stories of the elders.  At the same time, her drawings are also trying to maintain the images formed from the emotion itself. To accompany these drawings, the artist made up a short story. This can be read with my figure which is being reflected on a mirror, and this story is a new story created by combining mostly the elders’ ridiculous story-like expressions and the artist’s imagination.

 

Now, on the eve of the exhibition, the artist says that oddly she does not experience impatience nor anxiety right before exhibitions. She says that she even feels a sense of stability to the extent that it is worrisome. And above all, she says that she thinks she has matured. This gives me great comfort. I hope that those who see this exhibition can also be consoled. Also, I send my gratitude to the artist who, in this exhibition wrapping up 2013, allowed me to reflect on myself from the past up to today, putting aside the eyes heading towards the future.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전에 부쳐 _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디렉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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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전 까지 보아온 박경률 작가의 회화는 거대한 캔버스 위로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토해져 나오는듯한 이미지의 뒤엉킴이었다. 어느 날 작가는 치매 노인들과의 대화를 통한 드로잉 프로젝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고 이 프로젝트가 지금까지의 작가의 작업 태도와는 어떠한 연관성이 생길지 궁금해졌다.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를 위한 프로젝트가 박경률 작가의 새로운 스타일이 만들어 질 수 있는 다음 단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기존의 작업과의 의외로 긴말한 지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프로젝트 과정은 이러했다. 용산구 치매센터의 복지관에서 돌보고 있는 치매 노인과 작가의 친할머니를 대상으로 한다. 함께 옛날 얘기를 나누며 드로잉을 함께 그린다. 작가는 세 명의 노인들 하나하나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그들의 옛날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치매 노인과의 대화에서는 난데없이 유명 인사가 등장하거나 자신을 지칭하는 엉뚱한 명사들이 등장한다. 가령 "나는 노란색이야." 같은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연상하고 있는 머리속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노인들 각자의 드로잉이 드러나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들은 주로 과거에 머물러 있고 두서가 없으며, 정작 지금의 상황은 백지 상태이나 거의 60년도 넘은 기억을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작가의 손으로 대부분 재현되고 이들에 색을 입히는 작업은 노인들이 한다. 작가의 친할머니를 비롯한 노인들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인터뷰를 하였고 이는 영상으로 촬영되었다. 그리고 작가와 함께 한 노인들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가공되어 또 다른 성격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다. 그 영상은 노인 배우의 연기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 제작되었다

 

치매센터에서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후 나는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였다. 작가는 전시에서 보여 줄 거대한 드로잉들과 작은 드로잉, 할머니들의 드로잉, 영상 그리고 설치할 작업 등을 내 놓았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원래 자신의 작업 스타일이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캔버스 속에서 콜라주 되듯 구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무의식'영역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린다'라는 것에 대한 보다 집요한 탐색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예술에 있어서, 비록 '무의식적으로 그렸다'라고 표현할지라도, 뭔가가 표현되는 순간 의식의 상태에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가 세운 가설은 "무의식은 인식할 수 없는 범위에 있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의 범주 안에 무의식과 인식이 있게 되고, 그런 무의식의 범주에 있는 것들의 인식의 범위로 전환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예술에서의 무의식적 그리기일 것이다."라는 것. 작가는 워낙 혼자서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상호 교감하는 종류의 작업은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다. 익숙치 못한 접근 형식에 대하여 작가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던 작업이다. 그런데 이 노인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는 감정의 동화가 일어났던 모양이다. 프로젝트의 막바지에는 치매 할머니를 항상 데리러 오던 폐암 말기의 남편 할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셔서 치매센터로 더 이상 이분을 모시러 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치매할머니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고 작가는 슬펐다. 이 노인의 드로잉은 그래서 허전하고 연약하고 천진난만해 보인다.

 

우리는 드로잉들 속에서 그들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인식 가능한 기억들과 어느 지점에서 조합되어버린 가공의 이야기들이 뒤엉켜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는 그들과의 만남에서 얻어내려 하였던 무의식의 영역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서 그들의 찬란했던 혹은 서글펐던 과거의 감정을 공유하고 돌아온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감정의 이입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작가의 거대한 드로잉 속에서 감정선이 가미된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서 재현도고 있다. 그의 이전 회화 속에는 언제나 완성도 있는 탄탄한 이미지들이 모여 있었고 밀도감 있는 구성과 색채가 강렬하였다. 마치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세상에 드러낼 때 닦고 다듬어서 완성한 이미지의 요소들의 조합과도 같았다. 반면 이번에 만들어진 드로잉은 최대한 가공의 과정을 배제하였다. 노인들의 감정과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들을 최대한 날것으로 보여주고자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드로잉도 최대한 감정 그 자체에서 형성되었던 이미지를 최대한 보존하고자 하는 듯하다. 이미지들이 뒤섞여가며 완성된 드로잉들과 함께 작가는 짧은 소설을 만들었다. 이는 거울 위에서 비춰지는 나의 모습과 함께 읽어 내려 갈 수 있으며 이 소설은 대부분 할머니들의 소설 같은 황당한 표현들과 작가의 상상력이 조합되어 탄생한 새로운 이야기이다. ● 전시가 임박한 지금, 작가는 이상하게도 전시 직전의 조급함과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맘이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안정감도 느껴진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성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작가의 모습이 나에게도 큰 위안이다. 이 전시를 보는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2013년을 마무리하는 이번 전시에 미래를 향한 시선을 잠시 접어 두고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지금의 내가 어떠한 모습인지 반추할 수 있는 공간을 꾸며준 작가에게 감사를 보낸다.


Exhibition Review ; ‘Vulnerable Drawing’ _ LEE KWAN HOON (Curator of Project Space Sarubia Dabang)_ Monthly Art, Feb. 2014

WILLING N DEALING 2013.12.24-2014.1.24

WILLING N DEALING 2013.12.24-2014.1.24

박경률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는 프로젝트 성격을 띤 전시로 먼저 용산구 치매센터에서 치매 노인 3명과 함께 실행(인터뷰/4주간 24회, 드로잉)한 <가능성의 릴레이>(2013.11.2~29)와 연결된 구성을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치매환자인 친할머니의 인터뷰 영상과 치매 노인 3명의 인터뷰를 각색하여 노인 배우의 연기를 통해 제작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상, 그리고 그 노인들과 함께 얘기하며 풀어낸 드로잉들과 그 얘기들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단편 소설(<고요한 소녀>, 세 개의 거울액자 속에 새김), 또한 이러한 경험과 자신의 기억을 의식과 무의식 관계 속에서 배설한 낱개의 드로잉 및 서술된 드로잉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즉 ‘무의식적으로 그린다?’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화두를 프로젝트로 증명해보이려고 했다. 작가가 자율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어떤 대상을 ‘채우고-지우기’를 반복하며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상, 현상, 사건, 기억, 번안, 편견 등을 자신의 언어로 전환하여 콜라주하거나 스토리화하는 과정을 겪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화두도 이러한 되새김질 현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부딪히는 일상의 사건들과 잠재된 기억들을 자신만의 여과장치를 통해 걸러서 해체시키는 일련의 드로잉들을 페인팅으로 구조화하는 작업을 했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에 불과했던 드로잉들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자신의언어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실험하며 유연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거나 너무도 일반적 의미인 ‘무의식’을 화두로 삼아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고 대화한다. 그 과정이 다시 자신을 들여다보며(거울 현상) 이미 형성되었거나 무의식을경험하는 태도로 자신의 언어를 해체하는 자각현상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무의식의 태도로 접근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내어놓고 다시 시험받는, 그래서 역으로 영역화된 페인팅을 유연하게 해체시켜 ’연약한드로잉’이라고 명명한 것이 아닐까. (큰 작품의 드로잉은 여느작가들의 드로잉에 비해 구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는 언어의 환영체가 구축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감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닌, 언어와 이미지 사이를 열어놓고 탐색하는 드로잉적인 사유의 태도로 접근하게 하여 보는 이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며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고요한 소녀> 작품이다. 자기언어를 구축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박경률 작가의 프로젝트를 통한 시각적 행위는 끊임없는 화두로 시작되었고, 이어서 나와 사회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예견치 못한 내러티브적인 얘기들을 들춰내어 이미지효과를 떠나 메시지 전달로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로써 그가 앞으로 유형과 무형, 사람과 사람, 글과 이미지, 책 속의 앞뒤 간지 등의 수많은 ‘사이 공간’에까지 사유를 넓혀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을 거부하는 정서적 흐름이 그의 인문학적 태도에 기인하며, 동시에 주체의 인식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그의 이면과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가능한 시도들이었고, 하나의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차원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